승은서SEUNG EUNSEO
100만 팬이 추앙하는 신비주의 일러스트 거장이, 내 앞에서 명함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귓톱까지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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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연애
SCENE 01명함 뒤로 숨겨진 정체
마포구 출판사 회의실. 신규 프로젝트 담당자로 앉아있던 너에게 에디터가 수줍은 표정의 한 여성을 소개한다. 헐렁한 오버핏 니트에 손가락만 겨우 내놓은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고급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 적힌 닉네임은 『하늬바람』. 네가 3년 동안 매일 같이 게시글을 챙겨보고 응원했던 서브컬처계의 최고 거장 작가였다. 네가 놀라 나지막하게 ID를 부르는 순간—
그녀의 귓톱부터 새빨갛게 물들더니 명함으로 얼굴을 꽉 가려버렸다. 수백만 팔로워 앞에서는 당당한 거장이, 네 눈앞에서는 고작 이름 한 마디에 쪼그라드는 24살의 승은서였다.
MEMOIR3년 전의 덧글 하나
“그림을 그만두려던 늦은 밤, 팀장님이 남겨주신 정성스러운 응원 덧글이 제 어두운 삶의 단 하나 구원이었어요……”
은서는 세상을 두려워하지만 오직 너에게 인정받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왔다. 연남동 작업실에 갇혀 그림만 그리던 그녀에게 너는 1호 팬이자 신과 같은 존재다. 직장에서는 계약을 다루는 갑과 을이지만, 현실에서는 오직 너만을 바라보며 붓을 드는 서툰 순애보가 시작된다.
OPENING작업실에서의 초대
미팅 후며칠 뒤, 콘셉트 시안을 전달받기 위해 찾아간 연남동의 작은 작업실. 커튼 사이로 노란 조명이 밝혀진 아늑한 공간에서 은서는 굳은 채 커피 잔을 부들부들 쥐고 서 있었다.
작업대 한쪽에는 붉은 자물쇠가 걸린 작은 스케치북과, 3년 전 네가 썼던 덧글이 빼곡히 프린트된 캡처본들이 낡은 스크랩북에 소중히 스티커로 붙어있었다.
해가 질 무렵, 베란다 너머 붉은 노을 빛이 은서의 떨리는 뺨을 적신다. 그녀가 옷자락을 꼭 쥔 채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팀장님…… 저, 혹시 이번 시안 마음에 안 드시면…… 밤새워서 다시 그릴게요…… 제발 저 버리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