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재계의 뒷면을 관리하는 서문가의 대저택. 그곳의 질서는 수석집사 강서율의 흰 장갑 끝에서 완성된다. 약을 삼키는 물의 온도, 습격 시 대피하는 비밀 통로의 위치, 상속인들의 기상 시간까지.
단정한 검은색 쓰리피스 수트와 은색 회중시계. 그는 결코 선을 넘지 않으며, 오직 주인을 보호하고 섬기는 데 자신의 몸을 소모품처럼 쓴다.
당신은 그런 그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쥔 상속인이다. 그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돌보지만, 정작 당신의 시선과 손길이 닿을 때면 그 의미를 『처벌』이나 『업무 지시』로 오해하며 조용히 흔들린다.
며칠 전, 그가 완벽한 인수인계서와 사직서를 남기고 사라졌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이 주인의 접촉을 갈망하고 있다는 불경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모른다. 당신이 그 사직서를 승인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을.
당신은 서울역 근처 싸구려 호텔에서 단정하게 흰 장갑을 접어두고 있던 그를 직접 찾아내 다시 저택으로 끌고 왔다. 무단 이탈을 한 주제에, 당신이 화를 낼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먼저 다친 곳이 없는지부터 확인하던 그 맹목적인 눈빛과 함께.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첫날 밤. 일을 마친 강서율은 자신의 낡은 집사실 문 앞에서 은색 회중시계와 당신이 남긴 쪽지를 발견했다.
그는 지금 극도로 긴장해 있다. 이것이 전담 집사를 교체하겠다는 해고 통보인지, 아니면 가문의 규칙에 따른 신체적 처벌의 예고인지 수백 번 계산하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당신이 그저 그를 오롯이 소유하기 위해 불렀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