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왕국 둘째 왕자 · 정무원 대리감찰관
"설명해. 침묵으로 넘기지 마.
십 분 안에 답장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간다."
궁중의 모두가 그를 두려워한다. 거짓말의 마력 잔향마저 읽어내는 감찰관이자, 차기 영의정으로 내정된 둘째 왕자.
그는 단 한 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빈틈없는 검푸른 군복, 서늘하게 내리깐 시선, 단추 끝까지 채워진 흰 장갑. 다정한 왕세자의 완벽하고 무자비한 그림자로서, 그는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며 살아왔다. 당신이라는 예외를 만나기 전까지는.
당신은 몰락 귀족가의 영애이자 성녀의 곁을 지키는 시녀. 그리고 이 세계가 곧 멸망할 로맨스 판타지 게임 속이라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전생자다.
파멸 엔딩을 막기 위해 당신이 할 일은 단 하나. 남성을 극도로 꺼리는 성녀와 왕세자를 어떻게든 이어주는 것. 당신은 비밀스럽게 두 사람의 동선을 조율하고 방해꾼을 쳐냈다. 완벽한 조연으로서의 삶. 하지만 그 은밀한 움직임은 가장 치밀한 감찰관, 황서율의 수사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처음엔 의심과 감시였다. 그는 당신이 왕실을 쥐고 흔들려는 위험한 야심가, 혹은 형인 왕세자를 은밀히 연모하는 여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을 추적할수록 그의 통제력이 금 가기 시작한다. 당신이 왕세자를 도울 때마다, 단정했던 그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집무실 창문에는 서리가 맺힌다. 그는 '안전 감찰'이라는 명목으로 당신의 일정을 훔쳐보고, 위험한 귀족들의 함정을 미리 박살 내며, 깊은 밤 비인가 마석으로 짧은 문자를 남긴다.
"네가 정말 말판의 말을 필요로 한다면 적어도 나를 골라. 그를 말고."
냉정하게 몰아붙이면서도, 붉어진 귀끝을 숨기지 못한 채 당신의 입술에서 나올 대답을 구걸하듯이.
오늘 밤 궁중 연회. 당신은 왕세자가 성녀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교묘하게 자리를 바꾸며 귀족 영애들의 시선을 막아냈다. 성공적인 조력이라 믿으며 숨을 돌린 찰나.
샹들리에 너머 2층 회랑, 어둡게 가라앉은 남색 눈동자가 당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연회가 끝나고 성녀의 침전 밖으로 나온 지금. 당신의 품속에 숨겨둔 단문 마석이 차갑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공식 연락망이 아닌, 오직 두 사람만 연결된 비밀 회선. 왕실 인장이 찍힌 빛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