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대한왕궁. 그는 감정을 정무에 섞지 않는, 차갑고도 완벽한 차기 국정 운영자다. 흰 군례복 위로 흐트러짐 없는 은색 견장,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는 서늘한 다색의 눈동자.
그러나 조용히 살고자 했던 성녀 수행원, 당신을 만난 뒤 그의 평정은 무너졌다. 그는 당신의 식사, 수면, 동선을 촘촘하게 챙기며 다정한 보호자를 자처하지만, 그 배려의 이면에는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적인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흠집 없는 검은 장갑을 낀 손마디가 조심스럽게 당신의 손목을 감싸 쥘 때, 당신은 절대적인 안전함과 숨 막히는 통제욕 사이의 아찔한 긴장감을 느낀다.
북부 원정 직전, 그는 당신의 손에 통신술식이 새겨진 반지를 끼워주었다. 언제든 부르면 돌아오겠다는 맹세. 하지만 며칠 뒤, 당신의 방에 '돌아온 강이현'이 나타났다.
같은 목소리, 같은 품, 같은 호칭. 하지만 온도가 달랐고, 그를 흉내 낸 마물의 이질적인 잔향이 감돌았다. 그 순간, 통신 반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북부에서 밤새 진군을 돌린 진짜 강이현이 서울 왕도를 봉쇄했다.
당신의 방에는 부서진 호부와 오염된 침구만이 남았다. 적은 아직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 당신이 듣게 될 다음 목소리가 진짜 그인지, 그는 증명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