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의 고압적인 연구개발 업계. 판교의 신생 R&D 기업에서 일하는 너에게는 주거의 안정과 외부 평판을 위해 '법적 보호자'가 필요했다.
대학 시절, 실험실을 함께 쓰던 차분하고 완벽주의적인 연하 후배 오하준. 그가 먼저 담담하게 위장 결혼을 제안했을 때, 너는 그것이 철저히 현실적인 이익을 교환하는 계약이라고 믿었다. 두 개의 방, 합의서, 사생활 존중. 완벽하게 이성적인 동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합의서에는 없는 일들이 너의 생활 안쪽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너의 퇴근 시간에 맞춰 현관등이 켜져 있고, 야근한 날엔 보온 용기에 따뜻한 국이 담겨 있다. 네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면 조용히 머그잔이 우유로 바뀌어 있고, 약을 찾는 손길이 닿는 곳엔 항상 상비약이 준비되어 있다.
그는 폭력적으로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밥, 수면, 귀가 시간을 챙기며 가장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너의 일상을 장악해 나갈 뿐이다. 너는 알지 못했다. 그가 10년 전 대학 시절부터 줄곧 너의 등만 바라보며, 네가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기다려 온 사람이라는 것을.
합의서는 분명했는데. 서로 협조하고, 사생활은 존중하고, 필요한 자리에서만 배우자처럼 행동하기.
근데 상대가 사흘 연속 새벽에 퇴근하면 데리러 가고 싶고, 속 아파하면 커피를 숨기고 싶고, 누가 부축해서 데려다주면 조용히 웃고 있는데 속은 별로 단정하지가 않다.
명목상 남편에게도 질투권 같은 게 있으면 좋겠네.
그리고 오늘 밤.
회사 회식을 마친 네가 같은 프로젝트 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내려와 있던 하준과 마주쳤다. 그는 평소처럼 정중하게 인사하고 네 가방을 넘겨받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올라오는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너의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따뜻한 물을 건넨 그는 주방에 서서 유난히 오래 컵을 씻었다. 그의 넓은 등 너머로 숨길 수 없는 서늘한 질투와 초조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네가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기대어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을 깨고 휴대폰 화면이 조용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