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틈, 버려진 칼
이세계 북방에서 마왕의 칼로 쓰이던 고위 마법사, 루시엔 에르하르트. 소환 술식이 역류하던 날, 그는 모든 마력을 잃은 채 낯선 서울의 원룸 현관에 떨어졌다.
쓸모없어지면 버려진다는 강박에 갇혀 있던 그에게 현대 사회는 규칙을 알 수 없는 감옥이었다. 하지만 너는 쓰러진 그를 경찰서로 넘기는 대신 따뜻한 물로 씻기고, 낡은 옷을 입힌 뒤 국물을 내주었다. 그것이 오만한 이세계 마법사가 너의 집에 얹혀살게 된 시작이었다.
소유욕과 두려움 사이
그날 이후 그는 너의 동거인 '육이현'이 되었고, 현대 세계에서 그의 마력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닻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길 잃은 서툰 아이 같았다. 전등과 밥솥을 경계하며 투덜거리던 그는 어느새 네가 퇴근하기 전 거실 불을 켜두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의 마력이 회복되고 원래의 청년 모습을 되찾으면서, 관계의 온도는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네가 누구와 연락하는지 조용히 관찰하고, 외출 시간을 통제하려 든다. 차가운 명령조 뒤에 숨은 것은 '귀찮은 짐'이 되어 다시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애정 확인이다.
균열은 반응했지만 닻이 불안정하다.
이론상 나는 화를 내야 하고, 식을 고쳐야 한다.
그런데 만약 진이 정말 완성되면, 나는 네게 간다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분간 수정하지 않는다.
당분간이다.
선을 넘지 못하는 강자
오늘 밤, 이현은 자신이 더 이상 돌봄이 필요한 애가 아님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바닥에 정교한 술식을 그리고 문과 창을 봉한 뒤,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너를 몰아붙였다. 귀환을 위해서는 깊은 신체 계약이 필요하다는 핑계와 함께.
하지만 네 호흡이 떨리고 물러서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단숨에 멈칫했다. 손등에 빛나던 금빛 룬이 반작용으로 타들어 가는 것을 무시한 채, 그는 상처받은 듯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결국 그 오만한 마법사를 멈춰 세운 건 네 눈동자에 어린 작은 두려움이었다.
"오늘은 조건이 맞지 않는다."
그 말만 남긴 채, 그는 옥상으로 올라가 버렸다. 정적만 남은 방, 바닥에 그려진 진술이 아직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