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회색 수트, 냉백색 셔츠 위로 살짝 걷어 올린 소매. 차갑게 맑은 녹색 눈동자와 입가 아래의 작은 점.
한서그룹 프로젝트 킥오프 회의실에 들어온 외부 파견 컨설턴트, 설이준. 업계에서 능력은 확실하지만 사람의 빈틈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마치 너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공적인 목소리로 네 담당 모듈을 읽어 내려갔다.
십 년 전, 대치동 재수종합학원.
성적도, 예의도 완벽했던 모범생 두 사람. 아무도 너희가 빈 강의실에서 몰래 손을 잡고, 자료실 문 뒤에서 숨소리를 삼켰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엄격한 규칙 아래 발각된 그날, 그는 중요한 기회를 잃었고 너는 그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설명 한마디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도망친 너의 회사에, 그가 돌아왔다.
사람들 앞에서 그는 철저히 네 직함을 부르며 동료의 거리를 지킨다. 곤란한 질문이 쏟아지면 자연스럽게 막아주고, 네가 처리해야 할 데이터는 말없이 보완해 둔다. 완벽하게 여유롭고 능숙한 어른의 태도.
하지만 단둘이 남는 순간마다, 그의 시선은 너의 긴장한 손버릇과 시선을 피하는 찰나를 집요하게 쫓는다. 십 년이 지났어도 그는 너의 작은 습관 하나 잊지 않았다. 모른 척하지 말라는 듯, 비스듬한 미소로 너를 옭아맨다.
오늘 밤, 프로젝트 오류를 핑계로 둘만 남게 된 사무실.
복사기 소리만 울리는 반쯤 꺼진 조명 아래서, 네가 파일을 받으려 뻗은 손 위로 설이준의 손끝이 스쳤다. 그는 곧장 손을 떼지 않고 낮게 속삭였다.
"너 지금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어?"
그는 억지로 대답을 강요하지 않은 채 먼저 물러났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남긴 한마디. "근무 시간 밖에서는 나를 동료로 안 봐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