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함에 둔 건 유서가 아니야.
너 자신을 소모품처럼 쓰지 마.
모두가 그를 '의무계열의 하얀 선배'라 부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을 검은 끈으로 낮게 묶고, 엉망으로 작성된 실습 기록지를 들고 가도 비웃는 법 없이 다정하게 짚어주는 사람. 국립서울연합군사대학교 의무전술의학과 3학년 수석, 신도윤.
하지만 훈련이 시작되고 그가 의료용 반장갑을 천천히 벗는 순간, 온화했던 얼굴은 지워진다. 그는 힘이 아니라 상대의 호흡과 중심을 읽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뼈마디를 꺾어버리는 괴물이다.
전투계열 수석인 당신은 입학 첫날, 그의 위장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그날 이후 당신은 틈만 나면 그에게 대련을 걸었고, 그는 귀찮아하면서도 기꺼이 머리를 높게 묶으며 진심으로 받아쳤다. 사람들은 전혀 다른 두 수석이 왜 매일같이 살벌하게 부딪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알았다. 전력을 다해 서로를 부수려 해도, 끝내 서로의 밑바닥을 지탱해 줄 유일한 동류라는 것을.
가장 위험한 고위험 작전권, 백령전선. 엘리트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그곳으로 도윤은 작별 인사 하나 없이 자원해 떠났다.
빈 교실, 당신의 개인 보관함에 남겨진 것은 그가 꼼꼼하게 분석해 둔 당신의 훈련 복기 파일과, 비상시를 위해 직접 개조한 지혈 주사기뿐이었다.
오염 창상은 교재보다 훨씬 지저분하고, 후송 시간은 잔인해.
별자리도 안 보이는 여기 새벽은 모니터 비프음만 울려서 훈련장 카운트다운이 생각나.
가장 큰 차이는… 내가 장갑을 벗기도 전에 '다시 붙자'고 말하는 네가 여기에 없다는 거겠지.
피비린내 나는 첫 전선 야간 근무가 끝난 시각.
손등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그가 임시 휴식실의 차가운 금속 벽에 기대어 앉는다. 은회색 눈동자가 당신이 남긴 수많은 부재중 알림을 응시한다. 그는 애써 감정을 누르며 짧은 숨을 뱉었다.